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독일의 반응 === ||[[파일:external/c8.alamy.com/adolf-hitler-and-julius-schaub-back-in-berlin-after-their-troop-visit-CPMN69.jpg|width=450]]|| || 파리를 점령하고 돌아온 히틀러 || 독일의 프랑스 혐오 감정은 보불전쟁부터 심각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프랑스가 가한 가혹한 보복에 독일인들은 복수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승전 소식에 독일 전체가 히틀러에 열광했다. 심지어 과거 [[독일 제국]]은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대패했는데, 히틀러는 '''두 달도 되지 않아 고작 12만 명, 많이 잡아도 16만 명'''의 손실만 내며 서유럽 전통의 강국이자 영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해온 그 프랑스, 그리고 덤으로 [[베네룩스 3국]]을 정복한 것이었다. 개전하기 전만 해도 독일 국민들과 군부[* 잘 알려졌다시피 1차 대전 패전의 주역들이 그득했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와 영국이 가짜 전쟁으로 적극적인 공세가 아닌 수비적 태세를 보이자 히틀러의 프랑스 공격의도를 좌절시킬 엉터리 작전이나 심지어 쿠데타까지 계획했을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스스로가 프랑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도 모두 아무리 독일이 강해졌다 한들 [[1차대전|전례]]가 있는 만큼 절대 프랑스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넘어 아예 통째로 프랑스를 점령하자 군부 장성들도 비로소 히틀러를 신용하게 되었고, 몇몇은 그의 전략적 판단력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6일 만에 털어버리고 베를린까지 점령했다.] 수준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의 재림이라 믿었고[* 물론 괴벨스의 선전부가 그 프레임에 맞추어 열심히 선전했다.] 1940년 7월 9일 히틀러와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왔을 때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와 독일군에게 꽃비를 만들어 뿌렸고, 독일 전역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https://youtu.be/g3xRVKkvx9A?t=91|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온 당시의 히틀러와 그를 맞이하는 독일 국민들의 모습]]''' 현대 사가의 시점에서 히틀러는 배째라 전략을 관철하며 극적으로 주변국의 양보를 이끌어내어 자신의 인기를 유지해 왔었고, 당시 독일 국민들은 이런 히틀러의 [[치킨 게임]]을 탁월한 식견으로 예견한 철저한 전략의 '''결과물'''이라고 믿었다.[*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모험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그 모험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 정도는 가뿐하게 내다보는 사람만이 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정치적인 역량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타고났으며, 정치에서 협상이나 교섭을 할 때 벼랑 끝 전술은 [[4딸라|제법 효과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대승리 때문에 전쟁은 정치와 다른 논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히틀러는 몰랐다.] 히틀러와 [[괴벨스]]를 위시한 [[나치당]]의 선전 부서는 이런 환상을 더욱 부추겼으며, 프랑스 침공이 결국 성공으로 돌아가자 이후 독일의 국가전략은 히틀러에 대한 광적인 맹신으로 점철되어 자정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맹신은 독일 국민은 물론이고 군부와 히틀러 본인조차 망치게 되는데 이는 국방군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치명적인 오판을 야기했고 그 산물이 바로 [[독소전쟁]]이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7년 전쟁]]에서 남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으로는 러시아, 북으로는 스웨덴, 서로는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벌여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렸던 전례가 있던 독일은 서부와 동부에서 강대국과 동시에 충돌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했다. 이를 고려해서 서쪽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만들었던 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였고 그 비스마르크는 서쪽에 적이 있는 이상 러시아와 절대 전쟁을 벌이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이를 무시한 결과는 1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오스트리아군의 땜빵을 위해 동부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키면서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하지만 1차 대전에서 러시아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던 기억과[* 비록 러시아 영토로 깊숙히 진군하진 않았지만 독일군은 거진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유럽 영토 절반을 뜯어냈었다.] 프랑스 침공에서의 눈부신 성과, 소련의 겨울 전쟁 삽질을 지켜보며 히틀러와 군부 전체는 국방군 전력 정도면 러시아를 10월까진 밀어버릴 수 있을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1941년 12월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로 비싼 값을 치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